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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묵상

2012.02.29 야이로의 딸

by 다정다감 주인장 201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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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 9:18-26)"


*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문장, 단어 혹은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24절 '그들이 비웃더라..'
나였다면? 감히 비웃어? 라며 혼쭐을 내주거나, 아니면 괜히 삐쳐서 '그럼 안 살려준다'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전혀 개이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 위 내용이 인상 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의(혹은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나는 A형이다. 사람들은 A형을 소심하다고 하는데, 정말 나는 소심하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기분이 롤러코스터이다.
최근 교회의 장의자 시트를 교체하는 일을 진행하면서 참 여러가지 우여곡적을 겪게 되었다.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 본다든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잘 처리해서 '욕먹지 말아야 한다.' 라는 생각 뿐이었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따로 없다고 모든 일에 전심으로 임해야 한다고 설교했던 것을 정작 내게는 적용하지 못한 채,
이 일은 하나님의 함께하심과는 무관한 것처럼 여기며 일을 진행했다. 
참 부끄럽다. 오로지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려나'가 일 진행과 처리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왜? 생명을 살리시는 능력이 주님께 정말로 있었고, 예수님은 정말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려했기 때문이다.

내 삶과 모든 사역의 기준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리고 내게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정결함과 거룩함과 믿음이 있다면, 
나 역시도 세상 사람들의 그 어떤 평가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 위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을 기도문으로 바꾸어 봅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하신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 역시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게 두려워 할 것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그러나 삶의 순간순간에 여전히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저의 연약함을 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모든 일을 생명을 살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처리해 나가는,
그렇게 모든 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동행함으로, 주님만 두려워 할 뿐,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시고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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