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돌아온 구구즈(나도 구구다)
1년 만에 그들이 돌아왔다. 김준완, 안정원, 양석현, 이익준, 채송화. 99학번 동기인 율제대학병원의 교수님들. 그들과 주변 인물들의 웃기고도 감동적인 특유의 착한 판타지가 다시 시작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두 번째 시즌(이하 슬의생). 이우정 작가와 신원호 PD의 합작품들은 하나같이 흥행에 성공했다.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이어 슬의생까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법한, 공감 백배 에피소드들에 엉뚱발랄함과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감동코드를 잘 녹여내는 우정, 원호 콤비의 실력이 ‘병원’이라는 무대와 사랑스런 캐릭터들을 통해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것을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응답하라’도 97, 94, 88의 시리즈로 이어졌지만, 이번 슬의생은 조금 다르다. 주축 멤버들과 이야기의 흐름이 그대로 유지된 ‘시즌’제 드라마다. 그래서 더욱 기대하며 이 날을 기다려 온 나는 이번 슬의생 시즌2로 생애 최초 드라마 리뷰를 끼적대 보련다.
슬의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시즌2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일명 ‘구구즈’를 비롯하여 조연급까지 하나 같이 매력적인 캐릭터들간의 짝짜꿍 같은 케미다. 케미 중 케미는 역시 ‘썸’, ‘연애’일터인데, 슬의생은 이 부분을 대놓고, 그런데 거부감 전혀 없이 재밌게 그려준다. 또 다른 하나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2~3가지 에피소드들이다. 이번 시즌2의 1화 중 ‘김수정 산모’와 ‘연우 엄마’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시즌 1, 제1화의 염혜란 배우가 분한 ‘민영 엄마’ 에피소드가 남겨준 강렬한 임팩트에는 살짝 못 미치는 듯하나, 슬의생 특유의 ‘착한 감동’은 시청자의 마음에 따스한 울림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이 리뷰에서는 ‘케미’보다는 ‘에피소드’에 중점을 두고 리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냥 리뷰는 아니다. 나의 해석과 이야기를 가득 담은 주관적 리뷰 되겠다. 모든 리뷰가 주관적이겠으나, 주관적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나는 이 글을 통해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서 ‘슬기로운 교회생활’ ‘슬기로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 기억을 공유하다. (연우 엄마 이야기)
연우는 미숙아로 태어나 100일 잔치와 돌잔치를 병원에서 치룬 아이다. 그렇게 3년을 병원에서 치료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연우의 엄마는 친구 아이 돌잔치에 갔다가 먹을 것을 사들고 병원을 찾아왔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을 들고 오고, 그 우산을 놓고 가서 다시 병원에 들를 핑계거리를 만든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병원을 찾는 이유는 연우를 기억할 수 있어서다. 병원에 오면 ‘연우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어서 좋다. 연우가 지나던 복도, 연우가 쳐다보던 소아병동의 벽화, 연우를 치료해주고 아껴주던 의료진을 보면, 그리워만 하던 연우를 조금 더 선명히 추억할 수 있어서 그래서 연우 엄마는 병원을 자주 찾았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셔서 출애굽 역사를 시작하셨다.(출 2:24~25) 이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다.(신명기에는 ‘기억하라’는 권면만 15번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당신을 기억하도록 성례를 제정하셨다.(고전 11:23~26) 기독교 신앙은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토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고, 나의 삶에 어떻게 함께 하실 지를 믿고 누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는 기억을 먹고 자란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이 주는 양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기억은 이따금씩 추억이 되어 미소와 손잡고 나란히 우리를 찾아온다. 그렇게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고 힘을 북돋아 준다. 혀에 좋은 음식만 있는 게 아니 듯, 기억도 그렇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미혼모 동백은 엄마에게 버림받은 그 때, 그 이후 고통스런 순간의 기억들을 꺼내먹으며 그 힘?으로 아들 ‘필구’를 악착같이 키웠다. 그렇다. 기억은 맛이 좋건 나쁘건, 입에 맞든 안 맞든, 먹는 이에게 어떤 식으로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된다.
연우 엄마는 그 힘을 얻고 싶어 병원을 들른 게 아닐까? 그런 마음을 알 수 없던 소아외과 병동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기우를 표하기도 했다. 장겨울 선생도 별다른 용건 없이 병원을 오는 연우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고, 올 때 마다 자신을 찾는 연우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이제 남친이 된 안정원 교수에게 조언을 구한다. 정원은 겨울에게 대답한다. “연우 엄마는 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시는 거야. 다른 의도나 용건은 없어. 아이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연우가 병원 밖에서 살지 않았기에 연우를 기억하는 병원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싶어 그런 것이니, 다음에는 커피를 사드리며 이야기를 들어드리라고 조언한다. 그 조언대로 겨울은 연우 엄마와 함께 연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2. 최선에도 방향이 있다 (김수정 산모 이야기)
임신 19주 5일 째, 조기양막파수로 율제병원에 입원한 김수정산모에게 주치의인 염세희 교수는 쉽지 않은 상황을 상세히, 차근히 설명해주고 마음을 추스르라 권했다. 그러나 3번째 시험관 시술 끝에 어렵게 아이를 얻은 산모는 태동이 느껴지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며 추민하 선생에게 담당의를 양석형 교수님로 바꿔달라고 부탁한다. 다행히 염교수는 난 상관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새로운 담당의가 된 석형은 김수정 산모와의 첫 만남에서 아기의 생존확률이 상당히 낮음을 상기시켜 준 후에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확률이 제로는 아니니까 그 확률에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감사하다며 눈물을 터뜨리는 김수정 산모에게 석형은 불행 중 다행히 아기가 잘 움직이고 있다는 점, 산모에게 감염에 대한 징후나 열도 없다는 점 등의 긍정적 부분과 앞으로 어떤 조치들을 해 나갈 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같은 날, 같은 산모를 두 교수가 회진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전혀 다른 처방이 내려진 두 교수님의 회진 자리에 있었던, 전공의 민하는 석형을 찾아가 질문한다. “교수님은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실 수 있으세요? 누가 봐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낮은 확률 쪽을 선택할 수가 있어요?” 이 질문에 대한 석형의 답변이 명언이다. “난 그냥 산모와 태아를 도와주고 싶었어.” 그냥 도와주고 싶었단다. 그런 선택을 한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원망을 받을 수도 있다는게 무섭기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 그것만 생각한단다. 무서운 거 다 따지면, 한 걸음도 못나가니까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단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이야기를 볼 때면, 자연스레 영혼을 섬기는 목회의 이야기로 읽게 된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돈벌이나 지위향상을 위해 의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했고, 의사의 실력 없음이나 실수로 의료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이야기에서는 목회적 역량을 키우리라, 성경과 사람, 그리고 사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해야겠다며 공부의지를 다졌다. 그 상황에서의 그런 선택을 하는 의사, 석형을 보면서 나는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만나는 사람을 돕고 싶어 일을 하고 시간을 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예수님은 한 율법교사와의 대화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다. (눅 10:25~37)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지나쳐 버린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 보았던 바로 그 사람, 같은 사람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갈 때와 달리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갈 때, 더 위험해 진 것이 아니다. 이미 거의 죽게 된 상황이라는 점은 똑같았다.(30절) 그러나 그를 도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무엇이 달랐을까? 어떤 마음으로 도왔을까?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난 그냥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어” 민하의 질문에 대한 석형의 대답과 똑같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주막에 데려가고 다시 돌아와서 비용을 지불하겠으니 잘 돌봐달라고 하는 조치는 그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한 것이구나 싶다.
3. 교회, 율제병원을 배우자.
겨울에게 정원이 해주는 조언을 들을 때, 그의 확신에 찬 어조가 신경 쓰였다. “아마 연우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 그런 것 같아. 연우를 기억하기 위해 오시는 게 아닐까?” 라고 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듯 “연우 엄마는 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시는 거야. 다른 의도나 용건은 없어. 아이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라고 하는 단호함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작가의 이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그러니 나도 단호하게 이야기 해보련다. 작가는 정원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우리 주변의 ‘연우 엄마’들을 그렇게 믿어주세요. 그 믿음을 토대로 그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억공유하기’를 해주세요”
석형에게 감명을 받은 이유는 그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선택한 최선, 그것의 방향 때문이다. 자기유익을 구하는 최선 다하기는 감동이 아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끼쳐서라도 자기 배를 불리는 최선의 방향은 눈꼴 사나울 뿐이다. 석형이 다하려 했던 최선은 산모와 태아를 ‘돕는 것’이었다. ‘돕기 위한 최선’ 그게 포인트다. A가 B를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때, B는 A를 어떻게 생각할까? 김수정 산모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하건데, 신뢰하게 되고, 의지하게 될 것이다. 고마운 마음, A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돕는 것인지 속내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A의 선의와 성실함이 지속된다면, 이내 곧 분명 B는 A를 특별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겨울과 정원, 그리고 석형을 통해 교회가 세상과,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배우면 좋겠다. 우리가 슬의생 시즌 1, 제1화를 통해 배워야 할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믿어 주고 들어주기” “최선 다해 도와주기” “
연우 엄마에게 겨울과 정원이 그랬듯, 믿어주고, 들어주면 좋겠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했다. 믿으면 발등 찍힐까 의심부터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믿어 주고 시간 내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이가 있었던 율제병원 소아병동. 오늘날 교회가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 석형이 선택한 것처럼, 작은 가능성을 크게 보고, 닥칠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계획하며, 우선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그런 성도들이 되면 좋겠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했다.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소망을 보여주고, 그 소망의 이유를 물어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그런 성도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연우 엄마는 자기 못지않게 연우에 대한 많은 기억을 갖고 있었기에 겨울을 찾았다.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에 자기의 이야기에 공감해 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이 찾아 올 수 있게 하려면,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구별’되어야 한다며 공감을 저버리는 것은 ‘거룩’이 아니다. 거룩은 누구나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공감해주실 수 있으셨던 예수님처럼, 몇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었던 바울처럼, 그들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별 용건이 없어도 교회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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