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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제자입니까 -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 두란노 / 제자도

by 다정다감 주인장 2011.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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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75년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198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란 무엇인가?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가 제자이다. 저자는 70년대 아르헨티나의 한 교회를 목회하면서 성장을 맛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성장이 부흥이 아님을, 성숙이 아님을 그저 살찌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서문에서 그는 그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시기 시작했다. 그분의 첫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술수만 쓰고 있을 뿐, 네가 하는 일에는 나의 손길이 전혀 드러나질 않는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그는 제자도 사역을 감당하면서 그의 사역과 목회 가운데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제자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책은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 파트는 ‘새 포도주’로써 제자됨이 무엇인지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파트는 ‘새 부대’로써 그러한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할 ‘사람’과 ‘교회’의 ‘성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영적 유아에서 자라지 않으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1. 새포도주

저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주님을 주로 고백할 뿐, 삶으로는 그들의 삶이 종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복음을 말하지만, 그것의 중심에는 여전히 ‘내’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면서 그 중심에 하나님, 예수님이 있지 않고 ‘인간’이 자리하고 있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기쁨과 평강, 건강과 풍요를 맛 볼 수 있습니다. 또 당신이 예수님께 작은 것을 드리면, 그 분이 두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인간 중심의 복음, 곧 참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 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구원관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교리나 공인된 사실에 동조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받는다. 예수님은 초지일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언제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는가? 아무도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사영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삭개오가 구원받았는가? 그가 주님께 ‘순종’하였을 때였다. 그가 나무에서 내려 온 그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주되심(Lordship)아래 복종시켰다.

 

 

그렇다. 우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할 뿐, 신(信)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지 않는다. 단순한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믿음은 근거없는 자신감도 아니며, 지적 동의도 아니며, 정신통일도 아니다. 믿음은 삶이다. 행함이 뒤따르는 삶이다. 야고보가 ‘너는 무엇으로 믿음을 보이겠느냐? 나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겠다’고 말한 이유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사실 말뿐인, 삶이 전혀 뒤따르고 있지 않은 가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순종이요, 복종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곧 ‘구원은 복종이다.’라는 저자가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구원 얻은 자는 종으로써 살아가게 된다. 구원 얻은 자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순종으로 삶이 가득하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종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곧 종의 삶이다. 주님이 명하신 대로 살아간 자의 삶의 끝에는 ‘무익한 종’이라고 쓰여진 졸업장이 주어진다.위대한 하나님의 종은 존재하지 않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절대로 위대하지 않고, 그가 위대하다면 결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저 무익할 뿐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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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정확히 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면서 종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겁을 먹을 독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소는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들어보자.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드러나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나는 진짜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할 미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알았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그것이다.

 

 

사랑이 구원받은 증거이다. 구원의 증거는 봉사에, 담배 끊기에, 전도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사랑하는 자이다.

 

저자는 오순절계열의 목사이다. 그는 오순절 목사로서 사도행전 2:4만을 강조해왔을 뿐, 갈라디아서 5:22절을 강조하지 않았음을 사과한다. 성령 충만의 머리는 성령의 열매요, 꼬리가 방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됨을 나타내는 표증으로 방언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랑’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됨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은사가 많은 사람,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성경을 많이 알고, 또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인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선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선하다고 말하고,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가 정상이고 우리가 악한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여기서 빛이 무엇인가? 명예인가? 세상의 권력, 높은 자리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세상에서 부러워 할만한, 지위, 명예, 권력, 재산, 지혜를 갖게 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꼬리 되지 않고 머리가 되면 그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은 그런 것이 아니다. 빛은 사랑이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0-11)

 

 

2. 새 부대

이러한 기초적인 신앙의 틀 위에 그리스도인들을 성숙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종이 되고, 사랑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라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자라고 있지 않다. 저자는 성도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 표지를 다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첫째, 천편일률적인 기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긴밀해져 간다면,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는 다른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배우자, 혹은 연인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만남이 깊어진 후의 대화의 내용이나 깊이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로, 우리가 영적 갓난 아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교회의 분열이다. 바울은 각각 베드로, 아볼로,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그것이 영적 갓난 아이의 표징이라고 말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다고 서로 싸우지 않았다. 단지 서로 다른 설교자를 선호한 것일 뿐, 여전이 그들은 한 교회에 속하였다. 오늘날 성도들은 다른 교파에 속하였고, 다른 건물에서 집회를 갖고, 서로 헐뜯는다. 세 번째 증거는 우리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이의 특징이다. 반면에 어른은 줄줄 안다. 주는 것이야말로 어른이라는 표징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장해야하는가? 답은 제자도이다. 제자란 그의 스승의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점차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성도라는 말은 교회의 회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란 거룩한 길을 가는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를 말한다. 저자는 제자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제자도는 지식의 전달이나 홍보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교류이다.” 제자도에서는 지식 전달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 세움은 양육(formation)이었다. 우리는 예수님께 제자를 양성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머리에 담아둘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고, 행할 일을 가르치셨다. 그들을 감동시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듣는 제자들은 가르쳐 주신대로 행했고, 말씀하신 대로 살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양육법이다. 여기에서 제자도의 제일 법칙을 배울 수 있다.

 

 

“복종 없는 양육은 있을 수 없다” 사교모임에서는 명령도 복종도 없다. 그러나 교회는 사교모임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씻는 법을 가르칠 때에, 처음에는 씻겨주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씻으라고 명령할 뿐이다. 비누가 주전 4세기경 중국에서 고안된 것에 대하여, 무엇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또한 오늘날에 다양한 크기와 색깔, 다양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씻으라고 하면, 우리는 씻었다. 그리고 씻으라고 하지 않아도 씻는다. 복종 없는 양육은 없다.

 

 

제자도의 두 번째 법칙은 ‘복종 없이는 복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제자에게 명령하는 자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던 백부장, 그가 왜 예수님께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칭찬을 들었는가? 그는 제자도의 두 번째 법칙을 잘 알았던 자였다. 즉, 양육은 복종뿐 아니라 상호 복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위험한 전통들이 사라져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제자도로 인해 성숙해가면 갈수록, 체제가 성령의 새로운 흐름을 점점 더 방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체제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체제는 어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오늘을 위한 것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체제는 변화해야하며, 전통을 고집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제자도 사역을 돕는 세포모임(셀)이라는 형태를 제안한다. 세포모임에는 헌신, 토론, 계획 수립, 행동화, 재생산의 5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매번 이러한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어도, 이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세포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한 것인지 계획을 수립해야하며, 그것을 삶에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를 만들어야하며,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헌신이다. 저자는 이러한 세포모임이야 말로 교회의 뼈요, 근육이며, 주일에 모이는 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한 내부의 세포들이 튼튼하고 건강하지 않으면, 곧 피부도 죽게 되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저자가 말하는 모든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 부분은 제외하고 요약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본의는 매우 성경적이며 적절하고 생각한다.

 

 

‘내가복음’을 만들고, 성경의 일부를 취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 중심적 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나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를 묻는 싸움이다. 예배를 말하며, 선교를 말하며, 봉사와 구제를 말하며, 친교를 말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나’를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요, 왕으로 모신자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나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의 유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며, 나의 경험과 이성에 의한 판단과 선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성경의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선택하며,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신앙인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의 각오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은 그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본다는 것이다. 내가 진 나의 십자가를 보며, 나는 죽은 자임을 날마다 선포하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며, 예수님과 함께 죽은 바울 자신을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이다. 이것이 곧 제자의 삶이다. 제자입니까? 이 질문에 나는 어찌 대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예”라고 고백할 수 없다. 전도사인 내가 사람들 앞에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도 없다. 제자이고 싶다. 무익한 종이고 싶다. 내가 주를 닮아가듯 여러분도 나를 닮아가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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